2014년 1월 16일 목요일

세례와 침례

하나님의교회는 성경대로 행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새언약유월절,새언약안식일,3차7개절기를 지킵니다.
하나님의교회는 안상홍님과 하늘어머니를 믿습니다.


세례와 침례


침례(浸禮)는 헬라어로 ‘밥티스마(βαπτισμα)’다. 
‘잠기다, 적시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세례(洗禮)와는 차이가 있다


침례(浸禮)는 죄를 물속에 장례 지내고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기 위한 의식이다. 헬라어 ‘밥티스마(βαπτισμα)’는 ‘잠기다, 적시다’라는 뜻으로 영어 성경은 이 단어에 대해 번역하지 않고 음역하여 ‘뱁티즘(baptism)’이라고 한다. 

이것이 한글 개역성경에는 세례(洗 씻을 세, 禮 예식 례)라고 번역되어 있다. 얼핏 차이점이 없는 듯 보이지만 헬라어 속에 나타난 뜻이나 예식의 의미를 이해하면 세례가 아닌 침례(浸 잠길 침, 적실 침, 禮 예식 례)라는 용어가 성경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독교 관련 영화나 성화에는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는 장면이나 사람들이 침례를 행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그 배경은 요단강, 혹은 물가다. 그 이유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 그대로, 침례가 ‘물에 잠기는 예식’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 침례는 죄를 물속에 장례 지내는 의식이다. 죽은 사람을 장례 지낼 때도 흙을 두어 삽 덮는 것으로 장례를 치르지 않듯이, 몇 방울의 물을 뿌리는 것으로 죄를 완전히 장례 지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반드시 온몸을 물속에 담그든지, 온몸을 물로 적셔야 온전한 장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초대교회는 침례를 행할 때, 강이나 바다가 아닌 곳에서는 물을 뿌리거나 부어서 온몸이 다 젖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지금의 많은 교회들이 행하고 있는 세례 의식은 초기 기독교가 유대뿐만 아니라 여러 이방 지역에까지 전파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무역, 여행 등으로 불가피하게 사막을 지나야 하는 일이 있었는데, 한 모금 마실 물도 귀한 사막에서 복음을 듣고 침례를 받아야 할 경우나, 복음을 듣고 회개한 중환자의 경우 등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곤 했다. 이때, 온몸을 적실 만한 물이 없으니 물을 조금 뿌려 약식 침례를 베푸는 것으로 대체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초기에는 이러한 불가피한 상황하에서만 약식 침례가 허용되었으나 AD 120년경 이후 물이 충분한 지역에서조차 침수 예식을 하지 않고 물을 몇 방울 뿌려 약식으로 대신하는, 의롭지 못한 방법이 행해지기 시작하였다. 지금 많은 교회들이 채택하고 있는 세례 의식은 이러한 연유로 생겨난 것이다.


성경에는 분명 침수, 즉 물에 온몸을 적시거나 담가 예식을 행하는 침례식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과 사도들도 침례식을 행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적인 편의나 보편성을 내세워 성경의 가르침을 외면하는 행위에 대해 동조해서는 안 될 것이다.

2014년 1월 13일 월요일

육체의 부모님과 영혼의 부모님

엘로힘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하나님의교회입니다.
엘로힘하나님이신 안상홍님과 하늘어머니를 믿는 교회입니다.


육체의 부모님과 영혼의 부모님 


사람은 육체로만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다. 육체와 영혼이 결합된 존재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육체)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영혼)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세기 2:7)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어 본래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흙(육체)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영혼)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도서 12:7)


육체는 땅에서 나서 땅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하나님께로 와서 하나님께 돌아간다. 이처럼 육체와 영혼은 근본적으로 다르며 서로 구별되어 있다. 그래서 성경은 육체의 아버지와 영혼의 아버지가 다르다고 알려주고 있다.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히브리서 12:9)


만약 육체와 영혼이 같다면 육체의 아버지가 곧 영혼의 아버지가 된다. 또는 육체만 있고 영혼이 없다면 육체의 아버지만 존재하고 영혼의 아버지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육체의 아버지와 영혼의 아버지가 각각 존재한다는 것은 서로 구별된 육체와 영혼이 존재한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영혼의 아버지는 누구신가.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태복음 6:9)


모든 영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우리 육체에는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계신다. 그렇다면 우리 영혼에도 어머니가 존재할까? 아니면 아버지만 존재할까? 그에 대한 해답은 성경에 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라디아서 4:26)


성경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뿐만 아니라 우리 어머니도 계심을 알려주고 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왜 하늘에도 아버지가 계시듯이 이 땅에도 아버지가 계셔야 하고, 하늘에도 어머니가 계시듯이 이 땅에도 어머니가 계셔야 할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로마서 1:18~20)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의 섭리와 하나님의 신성을 보이는 만물에 담아 창조하셨다. 육체와 영혼은 분명히 별개의 존재며 근본도 다르다. 그러나 우리 육체가 아버지와 어머니 없이 존재할 수 없도록 창조하신 것은 영혼도 아버지와 어머니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섭리를 보여주신 것이다. 육체의 존재는 그 육체를 낳아주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게 한다. 이처럼 모든 영혼의 존재는 영혼을 낳아주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존재를 증거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투영된 영적 이치와 창조의 섭리를 깨닫게 하는 놀라운 말씀이다. 성경과 온 세계 만물이 증거하는 우리가 알고 믿어야 할 하나님, 우리 영혼의 부모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 두 분이다.

노아의 방주

하나님의교회는 성경대로 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지키는 교회입니다.
이 시대의 구원자되신 엘로힘하나님 즉 안상홍님과 하늘어머니를 믿습니다.

노아의 방주


"성경은 사실인가?"에 대한 질문은 "하나님은 과연 존재하시는가?"에 대한 역설적 질문이기도 하다. 인류는 오랜 시간 동안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해 오면서도 자연과 만물이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여기, 노아의 홍수사건의 과학적 증거와 낱낱이 드러나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증거를 살펴보자.


까마득한 옛날, 노아가 살고 있던 때, 온 세상에는 타락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람들은 몹시 악하고 사나웠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물로 쓸어버리기로 작정하셨다. 단 한 사람의 의인이었던 노아에게는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다. 그리고 모든 동물을 암수 한 쌍씩 방주에 태우도록 일러주셨다.


홍수는 타락한 사람들을 심판하시기 위한 것으로 일부 지역의 홍수가 아니었다. 땅 위에 사는 모든 동물과 모든 사람이 죽음을 당했다. 코로 호흡하는 생물이 다 죽은 것이다(창세기 6:11~7:23).


성경은 노아시대에 벌어진 홍수 사건을 창세기 6~8장에 걸쳐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특히 홍수가 진행된 날짜들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홍수 사건이 단순히 설화나 허구가 아니라 논픽션이라는 증거다.


전 지구에 대홍수를 일으킨 비는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2월 17일부터 내리기 시작했다. 비는 40일 동안 멈추지 않고 쏟아졌고, 지구는 150일간 물에 잠겨 있었다. 노아와 그의 일곱 가족이 탄 방주는 7월 17일 지금의 터키 아라라트산에 정박했다. 두 달 반이 지난 10월 1일 산들의 봉우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40일 후, 노아는 정찰을 위해 까마귀를 내보냈다. 그리고 7일 후 비둘기를 내보냈다. 비둘기가 감람나무 새잎을 물고 왔다. 어느 정도 물이 걷혔다는 것을 짐작게 했다. 7일 후 다시 비둘기를 내보냈을 때 비둘기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지구가 다시 생명을 제공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다음 해 2월 27일, 노아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동물들은 방주에서 나왔다. 그들이 방주 안에 머무른 시간은 무려 1년이 넘었다.


노아시대의 대홍수 사건은 사실일까, 성경 속의 신화일까. 그 미스터리를 파헤쳐보자.


첫 번째, 지구 표면에 나타나 있는 여러 가지 현상들과 증거들이 홍수 사건이 사실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당시의 홍수가 전 세계적인 홍수였음을 증명하는 몇 가지 지질학적 증거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세계 도처의 고산지대에는 염호(鹽湖)가 존재하고 있다. 염호는 염분이 많아 물맛이 짠 호수로, 실제 해발 1,700m에 있는 터키 동부에 위치한 반호가 이에 해당한다. 반호는 다량의 염분을 함유하고 있으며, 바다에 살고 있어야 할 청어가 산꼭대기의 이 호수에서 헤엄치고 있다. 안데스산맥의 티티카카호는 해발 3800m 높이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란에 있는 우르미아호는 1300m 상에 있다. 중앙아시아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내해인 카스피해 역시 염호로 육지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다.


그렇다면 바닷물이 산꼭대기에서 출렁이고 있는 이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일부 과학자들은 40일간 내린 비만으로는 이같이 지구의 모든 산을 덮기에는 부족하다고 입을 모은다. 다시 말해 전 지구적인 홍수가 일어나려면 해저가 솟아오르거나 육지가 가라앉는 등의 지각 변동이 일어나야만 한다. 따라서 홍수의 주요 원인으로 바닷물이 육지를 침범하는 경우를 가정할 수 있는데, 염호는 바닷물이 육지까지 범람했다는 결정적 증거가 되는 것이다.


두 번째, 화석상의 근거를 들 수 있다. 히말라야나 알프스 같은 높은 산맥에 어류, 어패류, 해조류 등 바다생물의 화석이 발견되고 있고, 화산이 폭발했던 흔적들이 남아 있다. 한 예로 아라라트산 4200m 부근에 베게용암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용암이 물에 급격히 식을 때 만들어지는 현상이다. 이러한 흔적들은 갑작스러운 천재지변으로만 설명이 가능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 외에도 노아 홍수와 유사한 이야기들이 신화나 전설로서 전 세계 도처에서 전해지고 있다.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의 전설, 이집트의 경전, 인도 산스크리트어의 고서, 태평양 여러 민족의 민담, 아메리카 원주민과 유럽의 토착민의 신화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대홍수에 관한 이야기들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신이 나타나 선택받은 사람들에게 대홍수를 경고하면서 배를 지을 것을 경고한다. 그 배에 갖가지 동물들을 데리고 살아남는다. 홍수가 끝난 후 배들이 산의 정상에 머무른다. 홍수가 끝났을 때 물이 말랐는가를 확인키 위해 새를 날려보낸다 등의 내용으로 성경 속 노아의 홍수 사건과 유사하다. 이러한 유사점들을 볼 때 실제 사건이 인류 선조들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전승되어 오면서 각색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국제표준 성서백과사전에는 “홍수 이야기의 보편성은 대체로 인간이 홍수에 의해 전 세계적으로 멸망을 당한 적이 있었으며 인류가 한 장소에서, 더 나아가 한 가족으로부터 퍼져 나갔다는 증거로 여겨진다. 모든 전승이 다 그런 것은 아닐지 몰라도 대다수의 전승은 동일한 홍수에 대해 말하고 있는 듯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자료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홍수 이야기를 우연이나 단순한 신화로 치부하기에는 고고학적 증거와 자료들이 너무나 많다. 노아의 홍수 사건, 그것은 결코 허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에 관여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증거다. 더불어 오늘날 인류에게 보내는 구원의 메시지다. 재앙이 일어나기 전, 인류가 어디로 가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모스부호 같은 것이다.


너희는 유다에 선포하며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이르기를 이 땅에서 나팔을 불라 하며 또 크게 외쳐 이르기를 너희는 모이라 우리가 견고한 성으로 들어가자 하고 시온을 향하여 기호를 세우라, 도피하라, 지체하지 말라 내가 북방에서 재앙과 큰 멸망으로 이르게 할 것임이니라 (예레미야 4:5~6)

2014년 1월 9일 목요일

초막절을 지키라

엘로힘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하나님의교회입니다.

초막절을 지키라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절기 가운데 가을 절기를 대표하는 초막절은 일년 중 맨 마지막에 든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초막절을 독특한 의식으로 치른다. 초막(草幕)이라는 말처럼 그들은 산과 들에서 종려나무 가지와 은매화라 불리는 화석류 나무 가지, 산버드나무 가지 등을 가져다가 성전 마당 또는 집 마당, 집 지붕 위에 두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온 후 40년 광야 생활 동안 장막 지었던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이 절기 동안 이스라엘 민족은 각종 나뭇가지로 꾸며진 초막에 거하며 불우한 이웃을 돌보고 기쁨으로 절기를 보냈다.

이러한 초막절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두 번째 십계명을 받아 내려온 후 십계명인 언약의 돌판을 안치하기 위해 성막을 지었던 것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성력 7월 15일부터 22일까지 7일 동안 성막을 짓기 위해 금, 은, 포목과 목재 등 다양한 재료를 가지고 왔다. 모세는 이 모든 재료를 모아 재능 봉사자들에게 성막을 짓게 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 지을 재료를 모았던 날을 기념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대로 지키게 하기 위하여 초막절을 제정해 주셨다. 아직도 유대인들은 초막절이 오면 각종 나뭇가지로 집 안팎을 꾸미고 있다. 


하지만 각종 나뭇가지만 초막절을 지키는 것은 초막절이 가지고 있는 이면을 잘 모르고 지키는 것이다. 초막절은 그저 초막을 짓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숨은 참된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


그러므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그들이 이 말을 하였은즉 볼지어다 내가 네 입에 있는 나의 말로 불이 되게 하고 이 백성으로 나무가 되게 하리니 그 불이 그들을 사르리라 (예레미야 5:14)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나무로 표현하셨다. 다시 말해 초막절에 각종 나뭇가지를 모은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은다는 뜻이다. 또한 초막절의 유래 가운데 모세가 성전 지을 재료를 모았던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요한계시록 3:12)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거룩한 백성을 일컬어 성전의 기둥이라고 하신 것은 우리들이 곧 성전 재료이며 초막절의 성전 재료를 모았던 것 또한 성전 재료인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이게 할 것에 대한 의미가 숨어 있다. 즉 초막절은 단순히 나뭇가지로 지키는 절기가 아닌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는 전도대회라는 의미다. 이러한 의미를 모른 채 산과 들에서 나뭇가지를 가져다 지키는 초막절은 마치 서과피지(西瓜皮舐)에 불과하다.


또한 초막절이 중요한 것은 이 절기 속에 담긴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초막절을 지키는 모든 인류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축복해 주셨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천하 만국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할 때에는 창일함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열국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애굽 사람이나 열국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의 받을 벌이 이러하니라 (스가랴 14:16~19)


초막절을 지키는 자들에게만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주신다고 말씀하셨다. 성경에서 말씀하신 ‘비’는 바로 성령을 의미한다.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 명절 끝날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요한복음 7:2, 37~39)


스가랴 선지자는 ‘초막절을 지키는 자에게 비를 내려주신다’고 기록했고, 예수님께서는 ‘초막절을 지키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초막절을 지키는 자만이 이 시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을 받을 수 있다. 오늘날 초막절도 지키지 않으면서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자들은 과연 누구에게 어떤 영을 받았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초막절은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 더 없이 중요한 절기다. 특히,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꼭 지켜야 하는 것이 초막절이다.

모세율법과 그리스도의율법

엘로힘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하나님의교회는 성경대로 행하며 이 시대의 구원자 되신 안상홍님과 하늘어머니를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안상홍님의 가르침에 따라 새언약안식일,새언약유월절,3차7개절기를 지킵니다.

두개의 율법


율법하면 두가지 율법이 있습니다. 바로 모세율법과 그리스도의율법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세율법이 아닌 그리스도의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 한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의 말씀을 귀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에 대한 이유를 굳이 들라면 성경에 기록된 이 말씀 때문이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요한계시록 22:18~19)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어떤 말씀도 더하거나 빼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이 이럴진대 하물며 사람이 그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을까.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하나님의 말씀들이 모두 소중하겠지만 그중에 특히 위의 말씀처럼 절대 가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 ‘하나님의 율법’이라 하겠다.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인 율법, 신앙생활의 지표가 되는 율법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나를 듣고 사람의 훼방을 두려워 말라 사람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 그들은 옷같이 좀에게 먹힐 것이며 그들은 양털같이 벌레에게 먹힐 것이로되 나의 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 (이사야 51:7~8)


하나님의 구원이 세세에 미치는 자들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는 ‘마음에 하나님의 율법이 있는 백성’이라고 기록했다. 하나님의 율법을 마음에 둔 자는 당연히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만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 율법을 소홀히 여기는 자에게 주시는 결과는 처참하다.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잠언 28:9)


하나님의 율법을 듣지 않는 자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를 뜻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듣지 않고 지키지 않는 자는 기도조차 가증하다고 하셨다. 그들의 기도가 가증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들어주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다. 하나님께서 기도도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과연 어떻게 구원을 받겠는가. 이와 같이 구원받기를 원하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자’라는 조건이 주어진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요한계시록 14:12)


요한이 계시를 통해 본 성도, 즉 거룩한 무리는 구원받을 성도들이다. 이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율법을 소중히 여기고 지키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이 없어질지라도 결코 하나님의 율법은 글자 획수 하나조차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신다고 하셨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태복음 5:18)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율법이 사실은 두 가지다. 이렇게 말하면 의구심을 품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려주신 계명’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성경에는 분명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율법이 있고 그리스도께서 세워주신 율법이 존재한다.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고린도전서 9:20~21)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며 사도의 권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 또한 사도로서 복음 전하는 것은 부득불 할 일이라고 말했다. 한 영혼을 살리기 위해 바울이 행했던 전도 방식은 실로 눈물겹다.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유대인들을 전도하기 위해 유대인처럼 행동했으며,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전도하기 위해 율법 아래 있는 자처럼 행동했다고 표현했다. 위의 말씀에서 우리는 바울의 열정 어린 전도에 대해 배울 수 있지만 이 가운데 율법에 대한 중요한 힌트도 얻을 수 있다.


바울이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한 것은 모세의 율법이다. 그런데 뒤에서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다’고 했다. 만약 율법이 한 가지였다면 이 말씀은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하다. 바울의 편지 가운데서도 알 수 있듯 분명 율법은 모세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율법이 있다. 그런데 왜 모세의 율법 외에 또 다른 율법을 주신 것일까.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가는 것이니라 (히브리서 8:7~8, 13)


첫 언약이란 옛 언약 즉, 구약을 말한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았던 그 언약이다. 첫 언약이 흠이 있어 결국 하나님께서는 둘째 것인 새 언약을 주셨다. 율법 자체는 완전하지만 우리가 완전하게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들을 위해 다시 세워주신 율법이 바로 그리스도의 율법이다. 결국 첫 것인 옛 언약은 낡아지고 그리스도의 율법인 새 약속은 세워지게 된다. 그렇다고 옛 언약이 폐해지고 사라진 것은 아니다.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히브리서 7:11~12)


모세 때 제사 형태는 짐승으로 제사를 드렸다. 죄를 지은 백성은 짐승을 가지고 제사장 아론에게 갔고 아론은 그것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으로 백성의 죄를 속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살렘 왕이자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로 제사를 드렸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멜기세덱이 행했던 대로 떡과 포도주로써 새 언약을 세워주셨다. 율법을 변역해주신 것이다. 즉 모세의 율법을 그리스도의 율법으로, 옛 언약을 새 언약으로 바꾸어주신 것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마태복음 5:17)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다시 세워주시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율법은 결코 없어진 것이 아니다. 모세의 율법이 그리스도의 율법으로 바뀐 것일 뿐이다. 이 같은 진리를 잘 깨닫고 있었던 바울은 율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로마서 3:31)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제대로 알고 지켜야 한다. 단순히 율법이 폐지됐다고 생각한다면 구원과는 영원히 요원해지고 말 것이다.